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나폴레옹 등장 이전에 프랑스 대혁명 주요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든 지체 없이 당통,마라,로베스피에르를 꼽을 것 이다. 이 세 혁명가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혁명 사상을 현실화하고자 하는데 있을 것 이다.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변호사 출신이며,마라는 의사 였다. 그 옛날이나 지금도 변호사 출신에 정치인들이 많은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의사 출신인 마라가 좀 특별해 보인다고나 할까? 오늘날까지도 이 3명의 혁명가에 관한 평가는 극과극 이라 할 정도로 학계에서 조차도 의견이 분분 하다. 로베스피에르를 두고 혹자는 피에 굶주린 흡혈기 독재자라 비난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은 절대 부패 할 수 없는 혁명가이자, 루소를 계승한 그의 아들이라고 칭송 한다. 전자는 3명의 혁명가 중 제일 마지막으로 그 자신이 그러 했던 것 처럼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기 전까지, 당통을 숙청 한 후 막을 연 공포정치에 관한 그의 모습들에 관해 로베스피에르를 비판 하는 목소리들이다. 후자는 후일 루소에 사회계약론이  헤겔,칸트,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사상이 큰 역할을 한 것을 두고 내리는 평가일 것 이다. 나는 이 극단적 두 평가가 나름에 설득력이 있는 얘기라는 것을 반박 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기 보다 그에 삶에 있어서 왜 이런 극단적 평가가 나름에 타당성을 갖고 양립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만 얘길 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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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는 1758년 5월 6일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 지방의 아라스에서 변호사에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친가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혼했고,어머니가 동생을 낳다 죽자 아버지는 어린자식을 버리고 유럽을 방랑했으므로,로베스피에르는 7살 때부터 외할머니에 손에서 자라야 했으며,그 이후로 아버지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외할머니 댁에서 부모도 없이 자란 로베스피에르 였지만,어릴적 부터 유난히 총명스러웠던 그는 파리 최고의 명문 학교인 루이르그랑콜레주에서 최고의 장학생으로 학교를 졸업 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르투아 주재판소에서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한다.그러다1782년 아르투아 주재판소 판사직을 겸하게 되고,1789년 4월 26일 루이16세가 프랑스 재정을 타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 삼부회에 아르투아 제 3신분 대표로 선출 된다. 바로 로베스피에르에 프랑스 대혁명의 대 단위 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이때 고향을 떠나기 전날 밤 로베스피에르가 썼던 [장 자크 루소의 망혼에게 드리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헌사]는 당시 혁명에 임하는 그의 심경에 루소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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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신분! 당신께서는 내가 나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일찍이 당신께서는 내 본질에 존엄성을 알게 하셨고,사회질서의 대원리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중략) 온갖 고난으로 내 생애가 조숙한 운명으로 희생 되더라도 나는 당신 처럼 인민에 권익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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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초반엔 두각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790년 3월 31일 자코뱅 클럽에 4월 의장으로 선출 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의장직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사람은 라파예트 였으나’삼두파’와 미라보가 로베스피에르를 밀어준 것이다. 1793년 1월 21일에 있을 루이16세 처형을 두고,직결 사형을 주장하는 산악파와 사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지롱드파가 루이16세를 재판에 회부해서 유죄가 인정 되었을 때 사형을 집행 하자는 의견이 대립 되고 있었다.당시 권력을 박탈 당한루이 16세가 브라운슈바이크의 프로이센 군대를 파리를 불러들이자 격분한 프랑스 시민들이 8월 10월 봉기를 한 것이다.즉각 사형을 주장하는 로베스피에르가 당시 국민공회에서 했던 연설은 다수의 지지를 얻지도 못 했을 뿐더러,판사로 재직했었던 그에  과거에 비해 몹시 실망스러운 억지성 발언이었다. 짧게 인용해 본 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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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왕이라는 이 비루한 개인이 민중에게 왜 중요합니까? 의원 여러분,민중에게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민중에 신뢰가 여러분에게 부과한 임무를 여러분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습니까? …..공화국,그리고 루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나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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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법관 출신에 의원이 한 연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에 막무가네 논리가 아닌가? 당시 혁명정부가 내놓은 경제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물가와 민생은 극도에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이런 민중에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루이16세에 처형은 불가피 한 상황이 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차라리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직전 장 봉 생탕드레의 발언이 더 구체적이며, 명확하다. 그의 발언을 인용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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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카페(루이16세)는 8월 10일 재판받았다.그러므로 그의 재판을 의문시하는 것은 혁명을 심판하려는 것이고,여러분 스스로를 반도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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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심플하고,명확 한가?

결국 재판에 회부되 투표를 거쳐,루이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 정부는 전 유럽왕조들로 부터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이 즉각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 했지만,4개월간의 투쟁 끝에 ,8월 10일 혁명에 대한 재가,국민 공회의 지롱드파 다수의 붕괴,그리고 내부의 숙청을 얻어냈다.

로베스피에르의 4월 10일 연설에선 그는 갖고 있는 정치적 범주,더 나아가 그가 추종하던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의 일반의지를 어디까지 확장해 나가고 있는지,그가 갖고 있는 계급적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한 발언이 명확나타나는데, 짧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민중들과 부르조아지의 가장 선진적인 분파 즉 중소 부르조아지,소규모 산업 생산자,소 지주,관리,지식인 등의 승리를 위한 결속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제3신분은 신흥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게 사실이다. 물론 이 부분을 전부로 해석하여, 자신에 독재를 위한 공포 정치를 행했던 로베스피에를 평가하고 싶진 않다.하지만 제일 먼저 암살되 세상을 떠난 마라 다음으로 공포정치를 반대하던 당통을 숙청하고, 로베스피에르가 피를 부르는 공포정치에 돌입한것은 사실이다.그리고 그가 행했던 “최고 존재의 축제”는 지나친 정치적 선전성이라는 해석 말고는 다른 평가를 받지 못 하는데 이의를 제기 할수없는게 사실이다. 물론 우리의 화가 다비드가 여기에 적극 동참했을 것이라는것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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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 동안 나타나지 않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26일 의회연단에 올라 개혁계획에 반대의사를 표한 모든 사람을 “인민의 적”으로 고발하다,국방위원 바래르와 테르미도르파에게 고발당해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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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루소에 사회계약론에 일반의지는, 자연 상태에 자유롭고 평등하던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약을 맺고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폭력을 수반한 유혈사태로 써의 일반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이상이 현실로 구체화될때, 보통 나타나는 현상인 괴리감 그런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오랜동안 고통받고 있던 민중들의 분노로 들끊었고, 혁명 정부가 들어 섰다고 해도 수시대에 걸쳐온 경제파탄이 일순간에 해소될수 있는건 아니었다. 또한 당시 민중들에겐 빵이 필요한 것이었지,일반의지나 사회계약론에 관한 인식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더군다나 서유럽에서의 프랑스의 위치상 사면이 국경인 관계로 외세의 침입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상황이 었으니, 그런 과제를 앉고 출범한 혁명정부는 늘 고발과 살육이 난무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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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는 일반의지를 피를 흘리지 않는,루소와 같은 이상적 현실로 만들어가기엔, 프랑스의 현실이 너무도 비관적이라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혼란의 과정속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를, 본인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의지로 잘 못 받아들인것이 아닌가란 생각이든다. 로베스피에르의 놀라운 혁명적 성과와 본인 자신에 신실한 혁명적 삶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 혁명적 피에 굶주린 독재자라 비난하는 평가를 완전히 씻어 낼 수 없는 부분들이 나 역시도 몹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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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로베스피에르와  쿠통,생쥐스트등 22명이 테르미도르 10일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 이후, 더 이상에 혁명적 이념에 관한 성과는 없었다. 그와 함께 혁명도 단두대에서 죽었는지 모른다.거듭된 혼란과 루이 16세 처형 후 전 유럽에 공공의 적으로  급부상한 프랑스 영토를 확장 해 줄 나폴레옹의 등장이 있었을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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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출처©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루이 레오폴 브아이 18세기경 릴 미술관

http://www.photo.rmn.fr/

2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 장 마생  2005년 8월 12일 초판 60p   발췌

3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 장 마생  2005년 8월 12일 초판  369P 발췌

4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 장 마생  2005년 8월 12일 초판 366P 3~5